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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시형 옮김)




 
저자
VICTOR E. FRANKL(1905-1997)
빅터 프랭클은 빈 의과대학의 신경정신과 교수이며 미국 인터내셔널 대학에서 로고테라피를 가르쳤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 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1905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고,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3년 동안 다카우와 다른 강제수용소가 있는 아우슈비츠에서 보냈다. 
 1924년 국제심리분석학회의 잡지에 글을 발표한 이후, 27권의 그의 저서는 일본과 중국을 포함한 세계 19개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그는 하버드, 서든 메더디스트, 스탠포드 및 듀쿼슨 대학교의 초청교수로 강의했으며, 로욜라 대학교 등 여러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전 세계의 대학교에 초청되어 강의했으며, 미국에서만 52개의 강의를 맡아 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심리의학협회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오스트리아 과학학술원의 명예회원이다.
 
 
옮긴이
이시형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예일 대학 병원 연구원과 경북대 의대 교수를 거쳐 강북 삼성병원장을 역임하였다. 서울대 의대에 출강, 사회정신건강연구소장, 한국정신의학연구재단 이사장직을 맡는 등 활발한 사회생활을 했다. 저서로는 <배짱으로 삽시다> <아담을 아느냐> <여자는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 <멋대로 키워라> <자녀 크게 멀리보고 키워라> 등이 있다.
 
 
 
느낀점
 직전에 읽은 책인, 최인아의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라는 책 속에서 언급된 책이기도 했고,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언급된 책이기도 해서 최인아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을 빌려 보았다. 다행히 옛날 버전의 책이라 그런지 몰라도 도서관에 비치 가능한 책이라, 연말에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현재 겪고 있는 시련과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이런 철학류의 책은 오랜만이거나 거의 처음 정독해서 읽은 것 같은데, 가볍지 않고 나에 대해 돌아보게 하고 인생에 대해 성찰해 보게 하는 책은 처음인 것 같은 느낌이라 이 책에 몰입해서 완전 재밌게 읽었던 것 같다. 현재 내 삶에 작은 고통과 시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혹은 큰 아픔이나 고통, 시련을 겪고 계신분들은 한번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또 하나 느낀 점은 최근 의학적 지식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는데 이렇게 간접적으로 의사가 쓴 책을 통해 의학적 지식을 배우고 공부, 체험, 습득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바로 책, 의사가 쓴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꼭 의사가 쓴 책이라고 다 좋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관심 있던 분야에 대해 의사가 쓴 책이면 나의 상황에 접목시켜 내가 알고 싶었던 부분은 내가 잘 체화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죽음의 수용소에 수용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남은 건 몸뚱아리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인간이 겪은 감정 등을 의사가 직접 체험하여 남긴 글이었다. 좋았던 구절이 너무 많았지만  인상깊었던 것에 대해 요약해서 몇 가지 키워드로만 남겨 보자면 유머, 사랑, 삶의 의미, 해방 이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도. 이 정도인 것 같다.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요법을 많이 언급하는데, 로고는 그리스어로 Logos 가 바로 '의미'를 뜻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아내느냐? 했을 때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었다.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세 가지 방식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선/진리/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것, 자연/문화를 체험하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읽으면서 좋았던 구절을 기록해 봄으로써 이 책을 다음에 다시 Remind 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밑줄긋기
 
 

 
 
 
1.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요? 제발이지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소."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가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이 짙은 먹구름 뒤에서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온통 아내 모습뿐이었다. 실제든 아니든 그때 그녀의 모습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났다. 
그때 한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그겆ㄱ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p.78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번 유추를 해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 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p.88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이 보이는 심리적 반응은 어떤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면부조고가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며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p.121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p.122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p.131
 
 
 나는 아직도 두 개의 자살미수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두 사건의 성격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자살 동기를 털어 놓았다. 그 동기는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내세우는 것, 즉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두 사람에게는 인생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그 중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의 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그 아이는 지금 다른 나라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닌 일이었다. 이 사람은 과학자로 그 동안 책을 써오고 있었는데 그것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사람의 아이, 그 아이에게 애정을 베푸는 데에 있어서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쏙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전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p.141~142
 
 
나는 단순한 위로의 말부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여섯번째 겨울을 맞지만 지금 유럽의 정세를 살펴보면 우리 처지가 그렇게 최악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 이것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p.145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나는 내 동료를 향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p.147
 
 
물론 수감자들은 특별히 고약하게 굴었던 이런 사람들을 성격적으로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감시병으로부터 아주 작은 친절이라도 받았을 경우에는 깊이 감동했다. 나는 어느 날 감독이 은밀히 나를 불러 빵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침에 배급받은 빵을 아껴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나를 눈물로 감동시킨 빵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면서 나에게 인간적인 '그 무엇'도 함께 주었다. 그것은 따뜻한 말과 눈길이었다.
p.152
 
 
<해방 이후>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인 용어로 '이인증' (depersonalization, 離人症)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육체는 마음보다는 거부감이 적은 법이다. 육체는 처음부터 새롭게 얻은 이 자유를 잘 활용했다. 드디어 우리 육체가 게걸스럽게 먹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몇  시간 동안, 며칠 동안, 그리고 심지어는 한밤중에도 우리는 먹었다. 한 사람이 먹어치우는 음식의 양이 심히 놀라웠다. 그는 먹고 또 먹고 그리고 커피까지 마셨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혀를 풀리게 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몇 년 동안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알았을 것이다. 그에게 말이 필요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는 것을.
 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심한 중압감(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신경과민 상태)을 겪었던 사람이 이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았다. 혀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응어리도 함께 풀리는 데에는 여러 날이 걸렸다. 그런 다음에는 감정이 그것을 억압하고 있던 기이한 속박으로부터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p.156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정신적 치료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받았던 사람에게는 자유를 얻은 후에도 그 전과 똑같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그런 정신적 억압상태에서 갑자기 벗어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 자유를 마치 특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제는 억압을 받는 쪽이 아니라 억압을 하는 쪽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이제 폭력과 불의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겪었던 끔찍한 경험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이런 일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에서 자주 발생한다.
p.157
 
 
어느 날 나는 다른 친구와 함께 들을 가로질러 수용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앞에 농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이 나타났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친구가 내 팔을 잡고 나를 밭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는 더듬거리면서 어린 농작물을 짓밟지 말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짜증을 냈다. 화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런 말 하지 말게. 그만큼 빼앗았으면 충분한 거 아니야? 내 아내와 아이는 가스실에서 죽었어. 그것으로 더 이상 할 말 없는 거 아니야? 그런데도 자네는 내가 귀리 몇 포기 밟는다고 뭐라고 하다니!"
 이런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평범한 진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진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귀리 수천 포기를 잃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p.158
 
 
나는 아직도 한 친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오른손 주먹을 내 코 밑에 갖다대며 이렇게 소리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내가 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면 내 손을 잘라버리고 말테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말을 한 친구가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수용소에서나, 그 후에도 나의 가장 친한 동료였다. 
p.159
 
 
정신적 억압에서 갑자기 풀려나게 되었을 때, 도덕적 결함을 보이는 현상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성격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을 때 겪게 되는 비통함과 환멸이다. 
비통함은 그가 살던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가 부딪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그저 어깨를 으쓱하거나 상투적인 인사치레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는 점점 비통해지면서 자기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겪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거의 모든 곳에서 거의 똑같은 말을 듣는다. "우리는 그것을 물랐어요." 그리고 "우리도 똑같이 고통을 받았어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저 사람들은 정말로 나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일까?"
p.160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神)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p.161
 
 
 
2.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의미에 중점을 둔 정신치료법) 동시에 로고테라피는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는 악순환 형성vicious-cirle formation 과 송환기재feedback mechanism를 약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집중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환자가 삶의 의미와 직접 대면하게 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렇게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우치도록 만드는 것이 정신병을 극복할 수 있는 환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로고스LOGOS 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p.167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homeostasis,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나는 정신건강에 대해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p.176
 
 
 
환자들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들은 내적인 공허, 자신 안의 허무가 늘 따라다니는 것을 느낀다. 앞에서 내가 '실존적 공허'라고 얘기했던 바로 그런 상황에 갇혀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일요병'을 한번 예로 들어보자. 일요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한 주일을 보내고 내면의 공허감이 밀려올 때,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이 겪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자살의 상당수가 바로 이런 실존적 공허 때문에 일어난다.
p.178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이 말처럼 인간의 책임감을 자극하기에 좋은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첫째 현재가 지나간 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둘째, 그 지나간 과거가 아직도 변경되고 수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교훈은 인간으로 하여금 살의 '유한성'은 물론 그가 자신과 자신의 삶으로부터 성취해낸 성과의 '궁극성' 과도 대면하게 만든다.
p.182
 
 
 
 
 비유를 하자면 로고테라피 치료사가 하는 일은 화가보다는 안과 의사가 하는 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화가는 자기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안과 의사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해주려고 노력한다. 로고테라피 치료사의 역할은 환자의 시야를 넓히고 확장하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잠재되어 있는 의미의 전체적인 스펙트럼을 환자가 인식하고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psyche 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 이라고 이름지었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취해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 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p.184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 - 을 체험하는 것,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거나(마지막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p.184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하믕로써 이런 잠재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p.185
 
 
 
시련의 의미
아무리 절망스런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에 - 수술이 불가능한 암 같은 불치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자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명쾌한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한번은 나이 나긋한 개업의 한 사람이 우울증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다. 내가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을 제외하고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제했다.
"선생님. 만약 선생꼐서 먼저 죽고 아내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말했다. "오 세상에! 아내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것 보세요. 선생님. 부인꼐서는 그런 고통을 면하신 겁니다. 부인에게 그런 고통을 면하게 해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그 대가로 지금 선생꼐서 살아남아 부인을 애도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내게 악수를 청한 후 진료실을 나갔다.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 - 희생의 의미 같은 - 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의미의 치료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의 절망은 병이 아니었으며, 둘째 내가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고, 그의 아내를 살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바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최소한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는 것은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의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p.187
 
 
 
"오늘날 정신겅강 철학은 인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가치체계가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의 짐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만들어온 것이다." 
-Some commnets on a Viennse School of Psychiary, <The Journal of Abnormal and Social Psychology>- 51, 1955, pp.701-3-
 
"피할수 없는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시련에 수치심보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여길수 있는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고 있는 미국 문화의 잘못된 풍토를 바로 잡는 데에 로고테라피가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 이라는 희망을 피력한 바 있다.
 
 
 
 
 
로고드라마
 어느 날, 열한 살짜리 아들을 잃은 후 자살을 기도했던 한 어머니가 우리 병원으로 왔다.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했다. 아들이 죽었을 때, 자기는 소아마비로 다리를 못 쓰는 큰아들과 함께 이 세상에 남겨지게 되었다고. 그 불쌍한 소년은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처지에 있는 장애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자기 운명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들과 함께 자살을 하려고 했을 때, 그것을 막은 것은 바로 그 아들이었다. 그는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게 삶은 여전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것을 깨닫도록 우리가 도와줄 방법은 없는 것일까?
 즉석에서 나는 토론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모임에 있던 다른 여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나이를 묻자 그녀는 "서른 살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이제는 서른이 아니라 여든 살이고, 지금 임종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지금 당신은 그 동안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아이는 없었지만 돈도 많이 벌었고 사회적인 지위도 얻은 풍족한 삶이었지요."
 나는 이렇게 말한 다음 그녀가 이런 상황에 있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상상해 보도록 했다.
 "어떤 생각이 들까요? 자신에게 뭐라고 얘기하게 될까요?" 
 여기에 당시 녹음했던 테이프에 들어 있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적어보겠다.
 "아! 나는 백만장자와 결혼했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쉽게 살았지요. 원도 한도 없이 살았어요. 남자와 연애도 해보고, 남자를 갖고 놀기도 했지요. 그런데 지금 여든 살인데 내 소생의 자식이 하나도 없네요. 늙어서 과거를 돌아보니 그 모든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 인생은 사실상 실패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그런 다음 나는 불구아들을 둔 그 어머니를 여기에 끌어들여 그녀 스스로 자기 인생을 돌아보도록 했다. 테이프에 녹음된 그녀의 말을 그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아이를 갖기 원했고, 이 소망은 이루어졌습니다. 아들 하나는 죽었고, 또 다른 아들, 불구자인 그 아들은 만약 내가 돌봐주지 않았으면 아마 보육시설로 보내졌을 겁니다. 비록 다리를 못 쓰고,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그 아이는 어쨌든 내 아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을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해주었고, 내 아들이 보다 훌륭한 인간이 되도록 키웠습니다." 
 이 말을 한 순간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다음 계쏙 말을 이었다.
 "내 얘끼를 하자면 저는 제 삶을 평온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삶은 의미가 충만한 삶이었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 아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따라서 제 삶은 절대로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임종의 순간을 맞아 과거를 돌아본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갑자기 자기 삶이 갖고 있는 의미, 그녀의 고통까지 포함된 자기 삶의 의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아주 짧은 삶, 예를 들어 그녀의 죽은 아들의 경우와 같은 짧은 삶이 80년의 긴 삶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 사랑과 기쁭으로 풍요로울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잠시 후 나는 또 다른 문제로 넘어갔다.소아마비 혈청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에 사용되는 시험용 원숭이는 이 때문에 끊임없이 주사바늘에 찔리고 또 질려야 하는 고통을 겪는 데, 그 원숭이가 과연 자기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알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모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원숭이의 지능으로 볼 때, 원숭이는 인간의 세계, 즉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세계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말을 듣고 나는 곧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인간이 삼라만상의 진화과정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세계를 초월하는 또 다른 차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인간이 겪는 시련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수 있는 그런 또 다른 차원의 세계 말입니다."
p.194
 
 
 
"신경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든 W. 알포트가 쓴 <개인과 종교 The Individual and Religion> 
p.203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p.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