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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마흔의 문장들, 유지현

 




다이어리에 거의 매일같이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적어 넣던, 저녁 약속이 없는 날에는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오늘 뭐 하냐고 먼저 운을 띄우던 스무 살의 나는, 지금처럼 혼자 책상 앞에서 논문이나 책을 읽는 게 삶의 낙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p.18


“우울증은 어둡고 검은 옷을 입은 여인과 같다. 그녀가 나타나면 그녀를 멀리하지 마라. 차라리 그녀를 받아들여 손님으로 대하고,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듣도록 하라.”
- 심리학자 칼 융
p.35


마흔이 되면 심리적인 변화도 있지만 신체적인 변화도 그 못지않다. 자정을 넘겨 마흔을 찍는 순간 딱 하고 여기 저기 쑤시고 아픈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흔 즈음에 여러 가지 신체적인 기능 저하을 경험한다. 오죽하면 ‘마흔앓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특히나 그때쯤 질이나 자궁, 난소와 관련된 부인과 질환이 잦아지는 것 같다. 나 역시 얼마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의사 선생님이 다른 특별한 문제는 없지만 자궁 경부에 폴립이 있다며 가까운 산부인과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이 나이에서는 흔한 일이고 간단한 레이저 시술이니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얘기를 들었지만, 가볍게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뭔가 씁쓸한 마음으로 친구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친구 역시 얼마 전에 자궁 근종 때문에 병원에 다녀왔다고 한다. 늦둥이를 계획하고 있던 또 다른 친구는 산부인과에서 무배란 월경 때문에 자연임신이 어렵다는 소견을 듣고 난임 시술을 받기로 했단다. 다들 여러 가지 이유로 산부인과 진료가 잦아진다.
p.41


외향성이 높은 사람들은 도파민 관련 외 영역, 즉 보상회로의 반응성이 상대적으로 더 높다고 한다. 이는 같은 자극이라도 외향성 수치가 높은 사람은 더 큰 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드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 비용이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외향성 수치가 높은 사람은 외향성 수치가 낮은 사람보다 그에 따른 보상에서 더 큰 만족감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외향성 수치가 높른 사람들이 그러한 일들에 더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p.64


외향성이 높다고 해서 더 친사회적이거나 인간관계가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외향성이 높은 사람은 처음 만난 사람과 더 빨리 친구가 될 수는 있지만, 이는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다.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공감하며 신뢰하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는 친화성이다. 나이가 들수록 감소하는 외향성과 달리 친화성은 나이에 따른 변화가 크지 않거나,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p.66


결국 우리에게는 건강한 자존감이 필요하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나는 자존감 높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마음먹는다고 곧장 자존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본래 자존감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데 그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차라리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 작은 호의라도 베푸는 편이 자존감을 높이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마흔의 자존감을 높이는 법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타인과의 교류 속에서 움직이는 행동력이다.
p.72

 

하루는 친구가 직장에서 승진하고, 내 집 마련에만 성공하면 행복할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언제쯤 행복해질 수 있을까? 직장에서 승진하고 내 집 마련에 성공하면 그 뒤에는 정말 행복할까? 

 쾌락 적응 운운하는 대신 친구에게 그럼 지금은 언제 행복한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때, 쇼핑하다 맘에 드는 옷을 발견했을 때 행복하다고 했다. 승진이나 내 집 마련 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행복한 순간을 물으면 아마 비슷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심리학 교과서의 원론 수준에서 따져보면, 우리는 아무리 좋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금세 익숙해져서 예전의 행복 수준으로 돌아가는 '쾌락 적응' 현상을 겪기 때문에, 승진이나 내 집 마련에 성공하더라도 친구의 행복에는 (아마도 한 1년쯤 뒤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우리는 취직만 된다면 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행복할 줄 알았다. 그리고 정말 합격 통보를 받고 입사하던 순가만큼은 도파민이 솟구치는 쾌감을 느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바로 1년 뒤에 우리는 다시 여기에 앉아 끔찍한 직장생활과 직장 상사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으며 함께 노가리를 뜯지 않았던가. 결혼을 할 때도, 첫째 아이를 가질 때도 상황은 비슷하다.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은 결혼만 하면, 아이를 갖고 싶은 사람은 아이만 생긴다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토록 원하는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의 행복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나마 결혼의 행복은 좀 더 오래 가는 것 같은데(좋은 사람을 만난 경우에 말이다) 결혼한 부부들은 약 2년 정도 원래의 행복감보다 더 높은 행복 수치를 보이고 그 후에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흥미롭게도(아이가 있는 독자라면, 예상한 대로) 자녀의 탄생은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기대와는 반대로 작용한다. 많은 부부들이 아이를 낳으면 더 행복해질 거라고 믿고 아기를 갖지만, 연구에 따르면 아이가 생기고 처음 몇 년간은 부모의 행복이나 부부 관계의 질이 급격히 떨어진다.

p.97

 

 

쾌락 적응은 좋은 결과를 내는 일을 많이 하도록 우리몸이 고안해 놓은 정교한 장치다.이러한 경항성은 우리가 살아남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우리의 정서적 행복에는 방해가 된다.

p.99

 

행복 심리학자 연세대학교 서은국 교수 연구진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조사하여 행복을 측정한 적이 있다. 조사 과정은 휴대전화를 이용해 현재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즐거운지를 대학생, 직장인, 주부,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루 동안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행위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먹을 때와 대화할 때. 만약 이 답변이 너무 원초적이고 허무하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당신은 지금 행복을 너무 멀리서, 아니면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완벽한 몸매를 원하지만 달콤한 케이크를 먹을 때 즐거움을 느낀다. 우리는 성공을 원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관계를 돈독히 할 때 즐거움을 느낀다. 우리는 돈을 벌기를 원하지만, 돈을 쓸 때 즐거움을 느낀다. 우리가 원하는 것, 즉 욕망 시스템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원하는 것을 많이 얻더라도 우리는 즐겁지 않을 것이다.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게 될지 모른다.

p.106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닫힌 문을 계속 보다가 열린 문을 보지 못한다"

- 미국의 사상가 헬렌 켈러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행복이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잠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욕망의 레이더를 끄고 현재의 나에게 온전히 집중해 보자.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본능적인 심리 반응들을 의식적으로 꺼두어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생존을 위해 진화한 심리적 편향들이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현재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욕망에 더 집중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p.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