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글,사진 전지민
에코라이프 스타일을 소개하는 독립잡지 「그린마인드」를 만들었다. 도시와 시골을 반반씩 오가며 생활하다가 5년 전 강원도 화천에 뿌리를 내렸다. 군인인 남편과 함께 다섯 살 딸아이 나은이를 키우며, 인스타그램 작은 창에 시골살이와 육아에 관한 기록ㅇ르 남긴다.
여성이자 엄마의 입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에코마인드를 글로 지어 맘앤앙팡, 베스트베이비 등의 매체에 연재한 바 있으며, 지금은 패션지 엘르 를 통해 엄마,작가,환경운동가의 시선으로 본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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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고 기억해야지 마음먹었던 순간들은 적어둬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내 기억을 꽁꽁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기억을 안고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
그녀는 육아랑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자기 자신을 함께 기르는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보낸 시간보더 더 나은 시간을 아이에게 주고 싶은 마음.
p.52
동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머리를 혼자 묶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우리 가족 모두 마음이 아플 때였다. 각자의 상처에 집중한 나머지 그 누구도 동생을 제대로 품지 못했다. 동생이 훌쩍 자라 브래지어가 필요한 나이가 되었을 때 문득 깨달았다.
‘언니라면서 동생 생일을 제대로 챙겨준 날이 별로 없네.’
동생이 얼마나 예쁘게 크는지, 여드름은 몇 개가 올라오는지 아무도 자세히 지켜보지 못했지먼 그녀는 잘 자랐다.
p.59
“아기의 최초의 환경은 엄마래요. 결국 내 자신이 오염되지 않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아이도 건강하게 이 상황을 만끽할 거라 믿어요!“
p.67
“우리 아이의 태명은 희봄이야!“ 태명의 뜻을 물었다. “아기가 우리 곁으로 오는 기쁜 봄!“ 기쁜 봄. 우리가 아이의 이름을 짓고 불러주던 그때부터였을까? 희봄이는 뱃속에 더 단단히ㅜ파고들어 무사히 뿌리를 내렸다.
p.80
어른이란 어쩌면 하나의 역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는다고 거저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식이 생겨서, 조카가 생겨서… 그런 식으로 나보다 여리고 어린 존재가 등장하며 시작되는 어른 노릇이 우리를 진짜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처음엔 어른 노릇이 서툴고 쑥스럽지만 계속 고민하고 노력하는 동안 우리는 아랫사람을 능숙하게 챙기는 진짜 어른이 된다.
p.135
언젠가 옷장을 정리하다가 꽤 여러 벌의 옷을 버렸다. 그땐 참 예뻤는데 지금은 이 옷들이 전혀 상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의 나다움을 충분히 누리고 부지런히 스스로를 자랑하며 살아왔던 그 시기가 이제는 다른 장으로 넘어가려는 듯하다. 혼자 만족하고 행복해하던 시간을 뛰어넘어 세 가족이 아웅다웅하며 행복의 둘레를 넓혀가는 삶. 남은 내 열정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조금씩 감이 잡힌다.
아이가 넘어지지 않고 안정감 있게 잘 걷기를 소망했던 지난 가을이 아주 먼 일처럼 느껴진다. 발달이 빠르고 느린 것을 걱정하던 날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는 이제 아주 잘 걷는다. 느릿느릿 기던 아이가 어느새 나무처럼 두 발로 서서 내게 달렬온다. 엄마는 그저 아이를 기다려주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1년이 걸린 셈이다. 우리의 일상을 지켜보던 친정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반복되는 사계절 따라 매번 같은 장소에 가는 이유를 이제 알겠어. 아이가 얼마나 자랐나 키 재기를 하듯이 같은 자리, 그 풍경 앞에 아이를 세우고 눈금을 그리고 있었던 거구나."
늘 짧게만 느껴지는 가을, 나는 내일도 아이와 부지런히 이 길을 달려야겠다.
p.162
여름이면 더위를 마주하며 충분히 땀을 흘리고 겨울이면 적당히 추위를 느끼는 게 좋다. 그래야 봄의 따스함과 가을의 청량함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p.165
"광합성을 하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광합성의 빛이, 전자파를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전자파 빛이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 『너의 여름은 어떠니』
p.169
잠자리에 휴대전화를 가져가지 않기, 아날로그시계를 보며 생활하기, 텔레비전이나 영상 매체 시청을 줄이기. 사실 나는 원래도 텔레비전을 잘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라디오나 디지털 기기를 이용한 어떤 음악도 듣지 않는 것은 꽤 큰 결심이었다. 시간은 고요하게 흘렀다. 아이와 도서관에 다녔고 산책을 더 오래 했다. 만들기, 그리기, 요리하기 등 나름 창장 활동에 투자할 여유도 생겼다.
디지털 디톡스 기간에 벌어진 모든 시간은 만족스러웠다. 심심한 순간에 사람은 가장 지혜롭고 창의적인 활동을 시작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문제라고 의식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디지털로부터의 완벽한 분리. 이 휴식이 주는 완벽한 심심함을 나는 조금 더 오랫동안 아이와 누려보려 한다.
p.174
세상의 모든 말을 처음으로 물어다준 이는 바로 엄마 아빠이다. 아이는 부모의 말을 소리 내어 따라 배우며 제 것으로 만든다.
아이의 작은 입에서는 언제나 엉뚱한 말이 넘쳐흐른다. 가끔은 그 말들이 얄미워서 화가 날 때도 있다. 그때마다 의식적으로라도 입을 다물고 기다려줘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잔소리가 마땅히 따라와야 할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면 아이 눈빛이 다시 빛나며 부모의 마음을 읽는 듯하다.
p.186
그런데 참 이상했다. 기쁨으로 상기되어 집에 돌아와도 모든 창문을 꼭꼭 닫은 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고 있으면 더위를 피했다는 안도감보다 죄책감이 몰려왔다.
'세상을 향해 무더운 바람 한줄기를 더보태고 있구나. 우리가 여름을 더 덥게 만들고 있어.'
나는 조금이라도 에어컨을 덜 켜고 아이와의 여름 산책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나은이와 함께 읽은 그림 책, 백희나 작가의 『달 샤베트』에서 약간의 해답을 얻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밤, 모두가 문을 꼭꼭 닫은 채 냉반기를 돌릴 때, 달이 녹아내렸다. 한 할머니는 대야를 가져가 달물을 받아 그대로 냉동실에 얼렸다. 정전이 된 아파트에서 할머니 집은 유일하게 빛을 내뿜었다. 그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할머니는 달 샤베트를 나눠주고, 사람들은 그제야 시원한 여름밤을 맞는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모처럼만에 에어컨을 끈 채, 창문을 활짝 열고 잠이 든다는 내용이다.
자전거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에어컨을 켜는 대신 곧장 씻기로 했다. 나은이는 핑크색 욕조로 풍덩 들어가 몸을 담갔다. 휘적휘적 물놀이를 하면서 아이는 "아이 개운해, 아이 시원해!" 하며 노래를 했다. 이 방법이 우리에겐 달 샤베트인 셈이었다.
"엄마 저는요,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여름이 제일 좋아요!"
그러면 나는 늘 그렇듯 동문서답을 한다.
"나은아, 알고 있나? 사실 가장 꽃이 많이 피는 계절은 봄이 아니고 여름이야."
p.234
육아는 극적이다. 아침의 온화한 분위기가 종일 이어지기 힘들고 절정으로 치닫은 상황이 갑자기 사랑과 감동의 순간으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삶이 서정적인 한 편의 시라면 좋겠지만, 사실 나의 육아는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막장 드라마인 것이다.
몸만 자란 나를 뼛속까지 성장하게 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은. '육아'는 기를 육(育), 아이 아(兒) 한자를 사용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를 육(育), 나 아(我)로 적어야 맞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내 안의 나를 기르는 일이 결국에는 진짜 육아인 셈이다.
p.248
아버지에게는 최근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독서를 즐기게 되셨는데, 그러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할 일도 늘어 일상에 활기를 찾은 것 같다.
"난 요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다 읽은 책을 건네면서 십만 원도 주고 만 원도 주고 한다. '이 책 다 읽고 오면 십만 원 진짜 드릴게!' 하면서 말이야. 그럼 그중에 진짜 책을 읽고 오는 사람들이 있어. 내 생각과 같은 사람을 사귀는 일이 그보다 값지지 않니? 요즘 중년들은 손주 자랑하려면 만 원씩 내고 해야 해. 그 돈으로 함께 차도 마시고 서로 이야기도 들어주는 거지. 어때? 아빠가 이렇게 늙는다. 허허"
" 왜 네가 보내준 책 말이야. 거기서 이런 말도 나오잖아. 플라타너스 줄기가 몇 미터냐, 그 굵고 높은 ㅅ나무가 무엇을 위해 버티며 살았을까. 나무는 탁구공보다 작은 열매 하나를 위해 살아온 거야."
은퇴한 후 자신이 살아온 삶을 곱씹는 아버지의 모습이 여느 때보다 편안해 보인다.
p.265
나의 경우, 자신의 아이를 세상 기준에 맞춰 비교하지 않고 아이의 앞선 성장을 뽐내지 않는 겸손한 엄마, 요즘 육아 트렌드에 조금은 둔감한 엄마에게 주로 끌렸다.
한 분은 뒤늦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운 탓에 주변 엄마들보다 한참 언니였다. 유행에 뒤처질지는 몰라도 항상 지혜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윤이네 엄마는 늘 내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생 선배 같은 언니였다.
또 다른 엄마는 아직도 고등학생처럼 보일 정도로 앳된 소녀 같은 엄마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보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편이었는데,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휘둘리지는 않았다. 알고 보면 자신만의 신념이 확고하고 모험심도 강했다. 주현이네 엄마는 무심한 듯 사람들을 챙겼고, 아이와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주현이 엄마 보람 씨는 여린 몸매에 잘 어울리는 원피스를 자주 입고, 늘 손바닥만 한 작은 핸드백을 메고 다닌다. 어느 날 그 작은 가방 안에서 불쑥 과도를 꺼내 보이며 내게 초록색 밤의 참맛을 알게 해주겠노라 말했다. 내게 밤 맛 한 번 보여주겠다고 칼을 준비해온 마음씀씀이가 예쁘장한 외모보다 더 곱게 느껴졌다. 덥석덥석 곤충도 잘 잡는 털털한 사람, 자연에 관한 지식이 해박하고 성격이 온순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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